[서울이코노미뉴스 박희만 기자] 미국 투자자들이 쿠팡의 개인정보 대규모 유출사건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문제삼아 미국 정부에 직접 개입을 요청하면서, 양국간 통상 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미 양국이 지난해 무역 합의를 타결했음에도 반도체 관세 등 불확실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쿠팡 문제가 새로운 통상 현안으로 부상할 경우 한미 관계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쿠팡 지분을 보유한 미국 투자회사 그린옥스캐피털과 알티미터캐피털은 22일(현지시간) 한국 정부가 쿠팡을 차별적으로 대우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으며, 이로 인해 주가 하락 등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하며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절차에 착수하겠다는 의향서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제한적인 규모의 개인정보 유출을 이유로 한국 정부가 범정부 차원에서 쿠팡을 압박하고 있다며,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무역법 301조에 근거해 한국의 ‘부당하고 차별적인 조치’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전자상거래업체 쿠팡은 한국법인 지분 100%를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된 모회사 쿠팡 Inc가 보유하고 있다.
쿠팡 Inc의 의결권 70% 이상은 미국 국적의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 보유하고 있다. 그린옥스의 창립자 닐 메타는 쿠팡 Inc 이사회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해 11월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사고가 발생한 이후 한국 정부 기관들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왔다.
정부와 여당은 사안의 심각성과 조사 비협조를 이유로 엄정대응에 나선다는 입장이다.
반면, 쿠팡을 비롯한 미국 기술기업을 대변하는 재계단체와 미 의회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가 쿠팡을 표적으로 삼아 부당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해왔다.
쿠팡 역시 이 사안과 관련해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적극적인 로비를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 청원은 미국 투자자들이 직접 USTR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무역법 301조는 외국 정부가 무역협정을 위반하거나 차별적·불합리한 조치로 미국의 무역에 피해를 준다고 판단될 경우, 행정부가 대응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USTR은 청원 접수후 45일 이내에 조사개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는 조만간 쿠팡 사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됐다.
조사 개시만으로도 상당한 외교·통상적 부담이 예상되는 만큼, 한국 정부로서는 단기간내 미국측을 설득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USTR이 조사를 개시할 경우 양국간 협의가 진행되며, 협의가 결렬되고 미국의 권리가 침해됐다고 판단될 경우 관세 부과나 수입 제한 등 보복조치로 이어질 수 있다.
쿠팡 투자자들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 미국내 한국 서비스 제공 제한,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301조 조사가 쿠팡 사안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디지털 규제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그간 한국에서 논의된 온라인 플랫폼법과 허위조작정보근절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대해 미국 기업을 차별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해왔다.
미국 매체 폴리티코는 지난해 무역협상 과정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 등 행정부 인사들이 디지털 규제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301조 조사를 검토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미국측 주장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디지털 규제가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기업에 동일하게 적용되며, 미국 기업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설명해왔다.
특히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이나 플랫폼을 유리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미국측은 시장 지배력이 큰 미국 기업들이 규제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더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팡 투자자들이 한국 정부를 ‘친중 성향’으로 규정하며 중국 기업에 위협이 되는 쿠팡을 고의로 압박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는 배경에도, 중국 이슈가 트럼프 행정부와 미국 정치권을 움직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깔려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정부는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고 투명하게 조사하고 있을 뿐이며, 이를 통상이나 외교문제로 확대할 사안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도 최근 방미기간 그리어 USTR 대표를 만나 이같은 입장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일각에서는 쿠팡이 사실상 미국 기업이라는 점과 대미 로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한국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이 아쉬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에서는 문제가 발생한 기업 경영진을 국회로 불러 공개적으로 추궁하는 관행이 있지만, 이를 미국 기업에 적용할 경우 미국 정부의 개입 가능성까지 감안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쿠팡 투자자들은 한국 정부가 쿠팡을 의도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근거로 이재명 대통령과 김민석 국무총리,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 민주당 의원들의 발언을 제시했다.
다만 일부 발언은 쿠팡을 특정하지 않았음에도 쿠팡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됐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