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코노미뉴스 윤석현 기자] 국민연금 제도가 시행된 1988년이후 처음 조기노령연금 수급자가 100만명을 넘어섰다.
정해진 시기보다 일찍 연금을 받는 대신 수령액이 평생 깎이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장의 생계를 해결하려는 은퇴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은퇴후 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이 없는 이른바 '소득 크레바스(소득 공백기)'를 견디지 못한 장년층의 우울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기수급 100만명 돌파, 그 가파른 상승세
9일 국민연금공단의 최신국민연금 통계자료에 따르면 지난 7월 기준 조기노령연금 수급자는 100만717명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100만명선을 돌파했다.
증가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불과 한달 뒤인 8월에는 100만5912명으로 늘어났다.
성별로 살펴보면 8월 기준 남성 수급자가 66만3509명, 여성 수급자가 34만2403명으로 남성이 두 배가량 많다.
가계의 주 소득원이었던 남성 가장들이 은퇴후 소득 단절을 메우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조기연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음을 시사한다.
조기노령연금은 법정 지급시기보다 1년에서 최대 5년까지 앞당겨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1년을 일찍 받을 때마다 연금액이 연 6%(월 0.5%)씩 깎인다는 점이다. 5년을 당겨받으면 원래 받을 연금의 70%밖에 받지 못한다.
이 때문에 조기노령연금은 일명 '손해연금'으로 불린다. 그런데도 수급자가 100만명을 넘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장의 현금흐름이 절박한 은퇴자가 많다는 뜻이다.
◇폭증의 기폭제, 2023년의 '끼인 61년생' 비극
전문가들은 지금의 100만명 돌파현상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 전조증상은 이미 2023년부터 뚜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공표통계 자료를 보면, 2023년은 조기연금 신청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해였다.
당시 상반기에만 신규신청자가 6만3855명에 달해 불과 반년 만에 전년도(2022년) 1년치 전체 신규수급자 수(5만9314명)를 훌쩍 뛰어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이런 폭증의 가장 큰 원인은 국민연금 수급개시 연령이 뒤로 밀린 탓이었다.
국민연금은 재정안정을 위해 1998년 1차 연금개혁 이후 수급개시 연령을 단계적으로 늦춰왔는데, 하필 2023년에 수급연령이 만 62세에서 63세로 한살 늦춰지면서 1961년생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1961년생들은 55세무렵 은퇴후 '이제 만 62세가 되었으니 연금을 탈 수 있겠지'라고 기대했으나, 제도 변경으로 인해 갑자기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퇴직은 이미 했는데 연금은 나오지 않는 이 1년의 '소득 절벽'을 버티지 못한 이들이 대거 조기연금 신청창구로 몰린 것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연구원의 당시 조사에 따르면, 조기연금 신청자의 상당수가 '생계비 마련'을 최우선 사유로 꼽았다.
◇"건보료 폭탄 피하자"…울며 겨자 먹기로 연금삭감 선택
단순한 생계비 부족뿐만 아니라 건강보험료 부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연금을 미리 당겨받는 경우도 상당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2022년 9월 건강보험료 부과체계가 개편되면서 피부양자 자격요건이 강화됐다.
직장에 다니는 자녀의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보료를 내지 않으려면 연 소득이 3400만원 이하여야 했으나, 이 기준이 2000만원 이하로 대폭 낮아진 것이다.
즉, 공적연금을 포함한 월소득이 약 167만원을 넘으면 피부양자 자격을 잃고, 지역가입자로 전환돼 매달 건보료를 내야 한다.
이 때문에 은퇴자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연금을 일찍 신청해서 매달 받는 액수를 줄이는 게 낫다"는 계산이 나오기 시작했다.
연금을 제때 다 받아서 소득기준을 초과해 건보료를 내느니, 차라리 손해를 보고 연금액을 깎아서라도 연간 수령액 2000만원 선을 넘지않게 조절해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결국 2025년 현재 조기연금 수급자 100만명 돌파라는 수치 뒤에는 은퇴후 소득공백을 메우기 위한 처절한 생존본능과 건보료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은퇴자들의 서글픈 셈법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셈이다.
◇노후빈곤 막을 실질적 대책 시급
문제는 조기연금 수령이 장기적으로 노후 빈곤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의 생활비와 건보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금을 앞당겨 받으면 죽을 때까지 감액된 연금을 받아야 한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연금액이 최대 30%까지 줄어든다는 것은 노후 안전망이 그만큼 헐거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비자발적 조기수급자가 늘어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부담이다.
법정 정년(60세)과 연금 수급개시 연령(현재 63세, 향후 65세) 간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은퇴후 재취업 시장 활성화 등 소득 크레바스를 메울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