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플레이션’에 스마트폰 가격 역주행…“오늘이 제일 쌀 수도”

[서울이코노미뉴스 박희만 기자] 스마트폰 시장에서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내려간다’는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반도체 가격 급등과 환율 상승이 맞물리면서, 출시된 지 수개월이 지난 기존 모델의 출고가까지 인상되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그동안 스마트폰 가격은 출시 초기 고점을 찍은 뒤 공시지원금 확대나 출고가 인하를 통해 점진적으로 하락하는 ‘우하향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같은 흐름이 깨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칩플레이션(반도체+인플레이션)’이 촉발한 구조적 변화로 보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는 지난해 출시된 주요 플래그십 모델 가격을 최근 기습 인상했다.

갤럭시 S25 엣지 512GB 모델은 163만9000원에서 174만9000원으로 11만원 올랐고, 갤럭시 Z 폴드7은 512GB 모델이 253만7700원에서 263만2300원, 1TB 모델은 293만3700원에서 312만7300원으로 각각 9만4600원, 19만3600원 인상됐다.

갤럭시 Z 플립7 역시 512GB 기준 9만4600원 상승했다.

이미 시장에 풀린 제품의 가격을 올리는 것은 통상적인 전략과 거리가 멀다. 통상 후속작 출시를 앞둔 시점에는 재고 소진을 위해 가격을 낮추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제조사가 더 이상 원가 상승을 내부에서 흡수하기 어려운 단계에 도달했다는 신호”라고 해석하고 있다.

핵심 배경에는 급등한 메모리 가격이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범용 DRAM 가격은 전 분기 대비 90~95% 상승했다. 낸드플래시 역시 기업용 SSD 수요 증가 영향으로 같은 기간 평균 55~60% 올랐다.

이 같은 급등은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와 직결된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은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해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DDR5 모듈을 대량 확보하고 있으며, 반도체 업체들은 수익성이 높은 AI용 제품 생산에 라인을 집중하고 있다.

그 결과 스마트폰과 PC에 사용되는 범용 메모리 공급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다.

스마트폰 원가 구조도 달라졌다. 과거 10% 내외였던 메모리 비중은 최근 20%를 넘어선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온디바이스 AI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고용량 스토리지와 고성능 메모리를 탑재한 모델일수록 원가 부담이 크게 늘어난 상황이다.

이 같은 가격 ‘역주행’은 스마트폰에 국한되지 않는다. 애플은 2024년 출시한 아이패드 프로 M4 모델 가격을 이후 인상했고,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5 가격을 최대 150달러(약 22만원) 올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 시리즈 X 역시 누적 200달러(약 30만원) 인상됐으며, 주요 PC 제조사들도 공급가를 15~30% 상향 조정했다. 과거 환율 영향에 따른 지역별 가격 조정과 달리, 현재는 반도체 원가 상승이라는 글로벌 요인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비자 부담은 불가피하다. 특히 고화질 촬영이나 AI 기능 활용을 위해 512GB 이상 고용량 모델을 선택하는 소비자일수록 가격 상승을 더 크게 체감하고 있다. 다만 수요가 집중된 256GB 기본 모델 가격은 유지되면서, 제조사들이 수요 이탈을 최소화하려는 전략도 엿보인다.

업계는 이러한 흐름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메모리 감산 기조와 AI 중심 수요 집중이 이어지면서 올해 상반기까지 공급자 우위 시장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하반기 출시될 차세대 플래그십과 폴더블폰의 초기 가격 역시 한층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결국 “기다리면 싸진다”는 기존의 소비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중심으로 재편된 IT 시장 구조 속에서, ‘오늘이 가장 싸다’는 말이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